옛날에 내 꿈은 동화작가였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갈망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이야기로 세상에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언니가 잠 못 드는 밤이면 머리맡에 앉아 귀여운 동물이 들어가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재웠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 친구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곤 했다.
인류 최초의 스토리텔러는 사냥꾼이었다. 사냥꾼은 생존을 위해 죽인 동물들에 관해 이야기했고, 동물들이 죽어갈 때 그 신비로운 경험을 묘사했다. 초기의 인류 생활이 사냥에서 농사로 바뀌면서 삶의 신비를 해석하기 위해 만든 스토리도 바뀌었다. 삶의 중심에 동물이 아닌 농작물이 들어왔다. 이 스토리는 끝없이 순환하는 신비의 상징이 되었다. 식물은 죽어도 끝없이 씨앗에서 다시 생명이 시작되는 순환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들도 이야기를 듣고 보고 말하고 다시 이야기를 하기 좋아한다. 스토리로 삶의 활력을 불어 넣고 의미를 부여한다. 인스타그램이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변경하는 작은 행위에도 감정을 전달하는 동작이 들어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이야기를 둘러싸여있고 그래서 나는 도시에 얽힌 삶과 사람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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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집 앞에는 복숭아밭이 있었다. 비 오면 진득한 흙풀냄새에 섞인 복숭아향이 짙게 퍼졌고 학교 가는 동네 친구들 목소리가 들리는 전주는 내 청춘의 시작이었다. 40분을 기다려야 버스가 오는 정류장, 학교 앞 서점과 TV, 인터넷이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였다. 청소년기에 종이책부터 플로피 디스크 ~ 클라우드까지 다양한 전자기기를 접했다. 생활반경은 좁지만 텅 빈 거리는 모두 내 세상이었고 큰 꿈을 꾸게 했다. 칠흑 같은 밤사이를 걸으며 어둠 속에서 문명의 빛을 갈망했고 서점이라도 들린 날이면 책 속의 발자국이 등 뒤로 우르르 몰려왔다. 밤을 빼곡히 메우는 도시의 찬란한 삶을 그리며 서울에 가서 제품디자인을 전공했다.
마침내 인문학적 탐구를 바탕으로 끝없이 전진하는 《판다곰, 팽다》 스토리를 만들어 그들의 여행을 연작으로 그리는 팝아트 작가가 되었다. 그림을 그리기 전, 도시의 본질을 보기 위해 풍경 속에 속하고자 한다. 멀리 있는 태양도 아침에 떠서 낮을 비추다가 밤에 저무는 건 알 수 있다. 도시의 사계절을 느끼며 거리가 자아내는 느낌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담아낸다. 주관적인 여행 경험과 상상 외에도 도시에 흐르는 정보 속 광고, 영화, 책, 유명인물 등 모든 것을 차용하여 대중문화의 이미지로 동시대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십년 후, 지금은 디지털과 회화를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 디지털 아트를 그 자체로 전시하기도 하고, 초안으로 하여 종이나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과 에나멜, 금박을 접합한 콜라주를 제작한다. 의도적인 픽셀 깨짐과 디지털 브러쉬의 느낌을 ‘디지털 요소’로 표현하고 복합되는 여러 이미지 간 시간의 공백을 나타낸다. 다양한 재료의 질감과 마티에르 두께감 같은 ‘회화적 요소’와 평면적인 캐릭터로 ‘일러스트적 요소’가 한 화면에 혼재하는 그림을 그린다. 매체와 재료를 혼합하여 현실과 상상 속 풍경에서 만난 이야기 속 다양한 감정을 드러낸다.